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다 이스카리옷 (문단 편집) == 배신의 이유 == 가장 흔하게는 [[물욕]]에 눈이 멀어서 팔아넘긴 것이라 하지만, 이런 설명은 약간 부족하다. 좀 개연성이 떨어지고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는 말.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다는 서술은 [[마태오의 복음서]]에만 나오고, 그마저도 유다가 배신을 하기로 결심하고 대사제들에게 가서 얼마를 주겠냐고 하자 제시한 값이다. 사실 이 가치도 알기 힘든데, 그냥 '작은 은 30[*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τριάκοντα αργύρια(triakonta argyria). 은전도 아니고 그냥 '작은 은 30'이다.]'이라고만 써 있지 화폐 단위가 안 써 있다. 당시에 통용되던 은전만 해도 드라크마, 데나리우스, 스타테르 등 다양하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거금도 아니고, 유대교 율법으로 성인 [[노예]]의 값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은전 서른 닢에 대한 기록은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종종 나온다. [[출애굽기]] 21장 32절에서는 남, 여종을 따지지 않고, 소(가축)가 뿔로 들이 받아서 노예를 죽게 한 경우 소의 주인은 30 세겔로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소는 돌로 내리쳐 죽인다는 구절이 있다. 즉 장성한 남자에게 율법상 목숨 값으로 줄 수 있는 최소 비용인 셈이다. 이럴 경우 문자 그대로 유다가 물욕에 눈이 멀었다고 받아들이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생긴다. 아무리 물욕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공동체를 배신하고 그 수장을 팔아넘기는 행위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이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를 행하기 전에 충분한 대가를 달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제시받은 대가는 고작 노예 1명의 값 뿐인데도 유다는 이걸 순순히 받아들이고 배신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다만 요한복음 12장 6절의 유다의 성격에 따르면 진짜 물욕에 눈이 멀어 얼마 되지도 않는 양에 예수님을 판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배신이라는 측면에서 죄를 지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양심에 찔려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고작 30 세겔로 팔아 넘겼을지도 모르는 일.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아니면 단순히 제사장들이 조롱의 의미로 그렇게만 준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성경]]을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는 문학으로 보는 신학인 [[성서비평학]]에서는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첫째는 [[창세기]]의 [[요셉(창세기)|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간 이야기를 모티브로 차용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 둘째는 [[즈가리야|즈카르야서]] 11장에서 '주님의 종'이 제사장들에게 경고하며 나를 믿으면 품삯을 달라고 했더니 제사장들은 겨우 은 30세켈만 줬고, 결국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자는 [[예수]]가 미리 천국에 가서 제자들을 기다릴 것을 암시하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들은 저주받을 것임을 암시하는 셈이다. 유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혁명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제자가 되었지만, 후에 자신이 생각하는 물리적 혁명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예수의 행보에 배신감이 들어 배반했다는 해석도 있다. 다만 끌려가는 모습을 본 직후 자신이 그저 무죄한 사람을 팔았다면서 [[예수]]를 팔아 받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성전에 도로 던졌다고 한다. 후에 제사장들이 이 돈을 피가 묻은 돈이라 여겨 성전의 금고에 넣어두길 꺼렸기 때문에 바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무연고자, 나그네의 무덤으로 사용했다. 밭을 살 때 쓰인 돈의 출처를 따 지은 이 밭의 이름은 '''피밭'''(하켈다마하≒아겔다마).[* 다만 이 피밭 자체는 엄청난 대농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가 3년간 횡령한 돈으로 산 것으로, 유다가 죽은 대농장 피밭과 제사장이 산 작은 피밭은 다른 것이라고 언급된다.] [[십자군]] 시대에는 이곳에 성 마리아 성당이 지어졌고, 그 후 성지에서 병자와 순례자들을 돌보는 일에 종사했던 [[기사수도회]]에 양도되면서 [[성지순례]] 도중 [[예루살렘]]에서 죽은 순례자들을 묻는 곳이 되었다. 현재는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아이러니]]. 사탄이 들어갔다는 [[루가의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 13:2)]의 주장을 무시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오는 자, 즉 이방인([[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를 회복할 부흥 군주라고 인식되어 왔다. 메시아 신앙의 기원이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이 모두 무너지고 장기간에 걸쳐 포로 생활과 외세의 지배를 받을 때 생성됐기 때문. 더불어 예수가 활동하기 100여년 전, 그리스 계열 헬레니즘 왕조들에게 이스라엘이 지배받을 때 유다 마카베오가 무장 봉기를 일으켜 [[마카비 전쟁]]을 통해 [[하스몬 왕조]]를 세워 이스라엘 독립왕국을 일으켰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른바 진짜 메시아가 등장했던 셈. 다만 후에 하스몬 왕조에게 정복당한 에돔 출신 안티파트로스가 하스몬 왕조의 내분을 틈타 로마를 등에 업고 이스라엘의 실권을 장악했고,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헤롯이 하스몬 왕통을 단절시키고 새로운 헤롯 왕조를 열었다. 이 헤롯왕이 [[성경]]에 등장하여 갓난 아기들을 죽인 그 헤롯왕이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렸던 이유도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아(=예수)가 새로운 다윗 왕조를 일으켜 이스라엘 왕조를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마침 또 헤로데 왕조는 에돔 혼혈에 하스몬 왕조를 찬탈한지라 첫번째 왕인 헤로데 대왕은 충분히 명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성경에서나 악한 왕으로 평가받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윗, 솔로몬 시절에 필적할만큼 넓히고 수많은 도시, 건축물을 건설했다.) 그다지 지지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이스라엘은 헤로데를 명군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당시 유대인들에겐 메시아=카리스마 쩌는 무장봉기세력의 리더라는 인식이 있었다. 물론 이땐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아 후보들도 있었다. 누가 됐든 로마로부터 무장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면 메시아가 됐기 때문.[* 사실 메시아라고 하면 굉장히 종교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메시아로 여겨지는 인물들 중에는 쌩뚱맞게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도 있는 등(아케메네스 왕조의 5대 군주로서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바빌론 유수를 끝낸 인물이다.) 마냥 종교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12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대부분도 예수가 그렇게 행동하리라 믿고 따라다녔을 것이다. 심지어 엄청난 기적 및 능력도 가졌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독립전쟁의 신호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를 지켜보던 유다는 아무리 보아도 예수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음 2가지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다. * 첫째, '''[[예수]]를 의도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면 예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야훼]]의 아들'로서 초인적인 권세를 드러낼 것이며, 이를 통해 [[로마 제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본격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가능성이다. 1961년도작 성서영화 <왕 중 왕>에서도 유다가 이런 논리로 예수를 배신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광야의 유혹|광야에서 사탄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니까."라고 유혹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에 대해 예수는 "주 하느님을 함부로 시험하지 말라." 하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으며 많은 창작물에서 이러한 구도를 차용하기도 했다. 한국 창작물 중에는 [[신돈(드라마)|신돈]]에서 신돈과 원현의 관계가 이 해석에 따른 예수와 유다의 관계와 흡사, 아니 아예 빼다 박았다. 그러나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런 해석은 낭설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정말로 유다가 끝까지 예수를 구원자라 믿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면, 그가 십자가상 죽음 이전부터 예수가 수없이 언급한 [[부활]]의 결과를 보지도 않은 채 바로 자살을 하였다는 점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미 예수는 라사로 등 여러 사람을 되살린 바 있다. 단순히 물질적인 기적 뿐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기적까지도 보여주었다. 게다가 이미 유대교 속에서도 부활은 존재했다.] 또한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던 사도들 중 하나인 유다가 그리스도교에서 금기시되는 자살을 하였을 리도 없다. 유다는 예수를 넘기려고 마음 먹은 시점에서부터 이미 타락하여 사도가 아니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다만 예수와 함께했던 나머지 사도들 역시 예수가 죽자 그가 부활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각자도생했음을 생각하면 어떠한 변호와 기적도 보이지 않고 예수가 순순히 죽자, 그저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스승마저 메시아가 아니였다는 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을 수도 있다.] * 둘째, 자신이 믿고 따른 예수가 이제 와 보니 글러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 혐의를 벗기 위하여''' 배신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가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는 것을 직접 본 제자라면 모순이 된다.[* 사실 성경에선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봤으면서도 야훼를 저버려 광야에서 죽었다고 서술하긴 한다.] 유다가 예수를 따르기 전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징세청부업자|세리]]로 알려진 경우가 꽤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사도들 가운데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학자들은 그가 금전욕이 많았던 자라 해석한다. 따라서 그가 정말로 금전을 탐하여 배신을 하였을 경우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금전욕과 위 해석에서 언급된 예수에 대한 실망이 맞물린 결과라는 해석 또한 가능하다. * 셋째, [[2006년]] 복원된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유다에게 자신을 팔아넘겨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구, 즉 예수가 메시아로서 완성되는 것을 도운 인물이란 내용의 설이 나온다. 이 메시아 완성설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제시된 것인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유다의 행동도 하느님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은 그 자체로 예수의 대속을 완성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식의 해석으로 오래된 철학적 문제기도 하다. 이사야서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초반에 소개되듯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반드시 필요했다. [[세례자 요한]]은 처음 예수를 보았을 때 한 말이 '보아라,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주님의 어린 양이다' 이다(요한 복음서 1장 29절), 유대교 전통에서, 어린 양은 제물로 바쳐지기(살해당하기) 위해 준비된 제물이며, 그냥 자연사한 양은 제물로서의 가치가 없다.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죽이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예수는 '단순히 죽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 유대교 의식에서 어린양이 번제로 바쳐지듯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로 간주되는데, 예수는 무죄한 존재였음에도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뒤집어써야 했고, 죄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해 이에 절망하며 고통을 맛봐야 했다. 즉 예수의 십자가형은 필연적이었으며, 여기서 성부는 죄를 뒤집어쓴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짓밟히도록 놔두는 공의로운 면모를 만족해야만 인류의 구속을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예수가 이 세상에 성육신하고 살다 갔다는 걸로 성립되는 게 아닌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누군가는' 예수를 죽여야 하며, 이스카리옷 유다는 '예수를 죽게 만든' 제 1 원인제공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라 해서 그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 속 섭리에선 저들의 이기적인 동기로 임한 행동 역시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는 전능자의 지혜가 묘사된다. 이스라엘을 벌할 때 이방국가들을 이용하거나, 현대 그리스도인을 징계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 간에 수치를 당하게 하거나 고난을 내리는 식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시에 각자의 자기의지로 하고 싶은대로 행했을 뿐이므로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된다. 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해서 기존의 질서를 되돌리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이었듯이, 모두가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결국은 세상 만사가 창조자의 완벽한 통제 하에 있다는 역설은 유한한 지성을 가진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스케일의 신비이다. 예수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이슬람]][* 전지전능한 알라가 보낸 예언자이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본다. 즉 알라가 보낸 예언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신이 '전지전능' 한 게 아닌데, 알라는 전능하므로 고통받지 않았다는 논리.]에서는 이스카리옷 유다가 [[십자가]]에 예수(이슬람에서는 '이사'로 불림) 대신 못박혔다는 전승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예수의 모습으로 변한 유다이고, 진짜 예수는 죽지도 않고 그냥 승천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